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 (2018)
슬기가 자신의 진짜 이름과 과거를 속인 것을 안 보육원 선생님은 진실을 묻기 위해 슬기를 따로 부른다. “저기야!” 슬기도 선희도 아닌, 모호하지만 단호한 이 부름은 영화가 진행되는 한시간 동안 주인공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호명으로 들렸다. 부유한 집안에서 부모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선희는 자기가 있을 장소를 찾아 헤매는 인물이다. 선희는 또래 친구들과의 가까운 관계를 원하는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연기로 채우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부터 또한 소외된다.
영화 초반, 선희의 거짓말이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시작 된 점이 인상적이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대화를 듣게 된 선희는 그녀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우연히 콘서트 표를 얻은 척 하며 선물한다. 첫번째 거짓말은 콘서트 표를 구하기 위한 거금을 타내기 위해 엄마에게 한 거짓말, 두번째 거짓말은 돈과 시간, 거짓말을 들여 얻은 표를 자연스럽게 건네기 위한 거짓말이다. 두번째 거짓말에는 첫번째 거짓말과는 다른 긴장이 배어있다. 관계에 쏟는 관심과 노력을 감추기 위한 이 즉흥적인 거짓말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운 가까움을 동경하고 원하는 선희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내내 선희는 친밀함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관찰을 통해 얻은 이미지를 쫒으며 재구성 하려고 시도한다. 선희는 자기가 생각하는 가까운 관계를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들기 위해 타인의 개성(이름)을 먹는다. 정미와 친구들은 그 점을 느끼고 선희를 거북해 한다. 선희는 정미들의 대화를 엿듣고 상처받지만 동시에 친해지고 싶었던 정미가 자신의 불안을 알아보고 불쌍해 한다는 사실에 보복하고 싶어한다. 선희가 선희로써, 그리고 슬기로써의 살아가는 학교 생활 모두에는 그녀의 관심의 축이 되는 한 여학생과 그녀의 무리가 있다. 정미와 방울이의 친구들도 개개인이 생동감 있게 그려지지만, 그들은 이름 없이 등장한다.
스스로로부터 소외된 선희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빈 장소로 만들고 끊임없이 도망치면서도 가까움을 갈구한다. 그 과정에서 선희의 가까움에 말려든 사람들 또한 장소가 되며, 기만당하고, 자신의 고유성을 도둑질 당한다. 거짓말이라는 죄가 아이덴티티의 도둑질이라는 또다른 죄로 이어진다. 보육원에서 선희의 돌봄노동은 속죄와 역할 분담을 통한 자리 찾기, 거짓말의 진화 등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돌봄과 생활이 밀착된 보육원이라는 공간에는 선희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없다. 또래 집단에의 소속감에 대한 갈망과 긴장에서 자유로운 선희는 원장과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보육원의 언니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지만,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하기도 한다. 선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학교는 이전에 맺은 관계의 연장선 바깥에 있는, 새로운 자신과 새로운 친구들의 가능성이 기다리는 백지같은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보육원에서 선희는 신분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 외에 다른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돌봄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는다. 선희가 보육원에서 가명으로 쌓아올린 친밀함 안에 진심의 교류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육원을 떠나 방울이를 만난 기숙학교에서 선희는 더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희는 사실의 파편만을 공유함으로써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진실을 숨기는 방법을 빠르게 터득해나간다.
선희가 슬기로써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경계는 말로써 명확히 그려진다. 선희가 서울을 떠난 뒤 모든 등장인물들은 사투리로 이야기하고, 선희를 알아본 자원봉사자와 선희만이 서울말을 한다. 갑작스레 다가온 낯익은 얼굴과 억양은 선희가 슬기로써 보육원 안팍에서 쌓은 안전한 감각을 뚫고 들어와 선희의 세계를 흔든다. 영화는 자원봉사자들이 떠난 날 보육원 교사가 선희의 진실을 추문하는 연결을 통해 봉사자와 교사 간에 어떤 말들이 오갔을 수 도 있음을 암시한다. 교사는 선희가 원장에게 스스로 털어놓을 기회를 주고, 선희는 원장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하고 보육원과 새로운 학교, 친구들을 떠난다.
선희는 또다시 모든 짐을 두고 떠난다. 선희가 어디로 떠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영화는 왠지 다음 정거장은 집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래도 버스 안에서 만난 아줌마의 물음에 선희가 새로운 이름을 대답하기까지 걸리는 긴 침묵에 담긴 망설임은 언젠가 선희가 자신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